그동안 나눈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마치 오래된 사진을 다루듯 조심스레 상자에 담는다.
왜 이 장소에 왔던 걸까.
무엇이 필요했을까.
어떤 이끌림이 이 시간을 이곳에 묶어두었을까.
혼자서는 하지 못했던 작업이,
거울처럼 나를 반영해주는 한 사람 앞에서는 용기가 생긴다.
내 모습이 보인다.
나를 꺼내어 볼 수 있게 된다.
아, 나 참 대견하네.
이렇게 해도 되는 거구나.
지금 힘든 게 당연하구나.
그리고 이 자리에 꾹 참으며 버텨 온 건… 바로 나였구나.
나의 첫 모습을 떠올린다.
두리번거리며, 어디에도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부산스러웠던 그날.
생각보다 정리가 안 된 말들이 여기저기 흩어졌고,
무엇이 먼저 나올지도 모른 채 두서없이 꺼낸 말들.
그런 나를, 놀라지도 않고 조용히 들어주던 그 사람.
그렇게 감춰왔던 감정이 터졌다.
울음이 터졌다.
울음과 함께
지하 벙커에 숨겨둔 이야기들이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흘러나왔다.
막을 수 없었다.
멈추지 않았다.
그 모든 흐름 속에
한 사람이 함께 있었다.
가만히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사람.
그 사람의 눈빛은 판단이 아니라, 존중이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낸 내가.
이제는 다 잊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한편에선, 그녀만큼은 다 기억해줬으면 하고 바랐다.
나는 다 놓고 떠나겠지만,
그녀만큼은 내 이야기를 간직해주면 좋겠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상담실로 들어오던 발걸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어느 날은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날.
그녀의 말에 따라
상자를 하나하나 정리해보기로 했다.
상상을 해봤다.
그동안 꺼냈던 이야기들을
말없이 접고, 모으고,
작은 상자 안에 조심스레 넣는다.
구석구석 채워 넣고
마지막으로 상자의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이름표를 붙인다.
‘과거’
당분간은 다시 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상자는 내 것이다.
내가 정한 자리에,
내가 원할 때 꺼내어 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이 상자는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 않을 것이다.
내 감정을 덮치거나
나를 고장 내거나
나를 무너뜨리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었고,
내가 무엇을 지나왔는지를 알게 되었을 뿐.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상자에는
비밀 암호를 걸었다.
나만 알 수 있는,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감정의 키워드들.
그 기억들은 이제
다른 삶의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그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새로운 시간으로 걸어 나간다.
이별이 아니라,
존재했던 시간을 기꺼이 정리하고 환대하는 태도로서의 작별.
그녀는 말 없이 나를 배웅해주었고,
나는 말 없이 그녀의 눈빛에 인사했다.
내가 떠나도,
그녀는 내가 존재했던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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