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결국 너는, 네가 다 옳다는 거지?”
남편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날, 나는 그냥… 지쳤다.
전날 아이의 말에 마음이 무너졌고, 그 감정을 끌고 남편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당신이 요리를 할 때... 우리는 솔직히 좀 힘들어. 양도 많고, 간도 세고, 그리고...아, 그날 아이가 그런 말을 했어.”
남편은 처음엔 조용히 듣는 듯했다. 그런데 대화는 늘 그렇듯 그의 다혈질이 끼어드는 순간 급변했다.
“내가 뭐, 잘해보려고 그런 건데.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해. 아무도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늘 불만만 얘기하네.”
그 말에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 그는 ‘자기중심적’이지만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모른다. 공감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를 스스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나는 그런 그를 오래전부터 ‘설명해야만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늘 대화로 설명을 해야 움직이는 사람이고, 감정의 결을 직감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 감정은 설명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떤 날은 “괜찮다”라고 넘긴 일이 며칠이 지나 “왜 그때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로 되돌아왔고, 나는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 예민한 거냐고, 그냥 넘기면 안 되냐고 말하는 그 앞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다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에게 중요해서다.
그 사람이 아닌 누군가였다면 그냥 웃어넘겼을 말이나 행동이 남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내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아까 그 말, 조금 서운했어.” 그랬더니 그는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래. 나는 그런 말 많이 듣고도 그냥 넘긴다?" 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정도 많고, 책임감도 있고, 무거운 짐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그 사람이 서운하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눈빛을 보거나, 말투를 느끼거나, 분위기를 읽지는 못한다.
그래서 늘 ‘뭐? 또 뭐가 문제야?’ 라는 말부터 나온다.
그리고 “아, 그랬구나.”는 설명을 아주 차분히 듣고 난 후에야 나온다.
나는 때로 지친다. 늘 감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항상 내가 먼저 꺼내야 한다는 부담감.
그는 내 감정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단지 모르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한편으론 조금 슬프고, 또 한편으론 조금 마음이 풀린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 사람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바라지 않게 되니까.
며칠 전, 아이의 말을 꺼낸 뒤 남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이 고맙다고 느꼈다. 그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여서.
"그 말, 나도 충격이었어." 남편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이기적으로 보였다는 게... 미안하더라."
그 말은 그가 내 감정을 완전히 이해해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 안에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었다.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사람은 감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듣고 반응할 수는 있다.
그날 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오랜만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말은 서툴고, 어떤 말은 맥이 빠졌지만, 그 속에서 나는 ‘이 사람과의 대화가 아직 가능하구나’라는 희망을 느꼈다.
남편의 무심함이 늘 나를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이제 나를 더 들여다보고, 그에게 더 구체적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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