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별이의 글쓰기/글쓰기

애도_상실에서 회복까지

석은별 2025. 5. 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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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놓은 그녀, 다시 잡기까지

– 관계 안에서 애도하고 회복하는 내면의 항해

삶은 종종 항해에 비유된다. 함께 탄 배는 공동체의 상징이며, 그 위에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죽음의 소식은, 누군가에게 그 노를 놓게 만든다. 이번 글은 상담 중 만난 한 여성의 심상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채 애도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심상으로 만난 그녀의 내면

그녀는 여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노를 젓는 배에 탑승해 있었다. 이 배는 물리적 배가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속한 삶의 공동체, 관계망이며, 일상에서 감당하고 있는 다양한 역할을 상징한다. 가족, 직장, 사회 속에서 맡은 책임의 무게는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노처럼 그녀의 일상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그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그녀는 더이상 노를 저을 수 없었다. 노는 손에서 미끄러졌고, 그녀는 배 한가운데서 담요를 덮고 누워 있게 되었다. 이는 흔히 애도의 초기 단계에서 보이는 '정신적 마비' 혹은 '기능 정지' 상태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내담자들은 "살아 있어도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심리적으로는 '멈춤'의 상태인 것이다.

‘민폐’라는 감정: 한국적 애도의 그림자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자신을 ‘민폐’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녀는 배 위에서 쉬고 있는 동안에도 동료들이 자신 때문에 더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는 관계 중심 문화에서 자주 관찰되는 정서다. 슬픔을 표현하기보다는 조용히 견디는 것, 타인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러한 애도의 모습은 개인의 고통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부담’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러한 정서는 '죄책감의 애도'로 이어지며, 자기 회복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죄책감의 정서를 다행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동료 중 한 사람이 다정하게 다가와 "충분히 쉬고 다시 노를 저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무의식의 억제를 해제시키는 상징적 열쇠였다. 그 말에 그녀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억눌렸던 감정이 흐르기 시작했고, 애도는 ‘진짜로’ 시작되었다.

억제된 애도에서 진짜 애도로

Freud는 애도를 '자아가 잃어버린 대상과의 정서적 연결을 끊고 새 대상에 에너지를 재배치하는 작업'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한 ‘잊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가능한 작업이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애도를 억제했지만, ‘민폐가 아니라는 수용’을 통해 울 수 있었고, 그 울음은 자기 안의 상처를 씻어내는 상징적 정화의 행위였다.

J. Bowlby의 애도이론에 따르면 애도는 충격과 부정(Shock and Numbness) – 갈망과 탐색(Yearning and Searching) – 절망과 혼란(Disorganization and Despair) – 재조직(Reorganization) 네 단계로 이뤄진다. 그녀의 심상에서 볼 수 있었던 배경 역시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 처음엔 충격으로 인해 노를 놓았다.
  • 이어지는 시간 동안 내면의 갈등과 자책이 이어졌고,
  • 울음은 절망을 통과하는 상징적 터널이었다.
  • 그리고 그녀는 재조직의 단계로 향한다. 다시 노를 잡고, 배를 저으며 함께 육지에 도달한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회복된 자아

많은 애도 작업에서 회복은 개인의 몫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여성의 사례는 '관계 안에서 치유받는 애도'를 보여준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해와 배려는 그녀가 자책의 늪에서 벗어나 자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애도는 타인에게 짐이 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공동의 작업일 수 있다.

이 점은 현대 사회의 심리적 고립 속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많은 내담자들은 ‘나 혼자 아파야 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애도는 원래부터 ‘공공의 통과의례’였고, 공동체의 품에서 슬픔을 나누며 살아내는 것이 인간 본연의 방식이다.

배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극단적 상상은, 그녀가 느낀 고통의 깊이를 상징한다. 이는 실제 자살 충동이 아니라,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적 탈출욕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관계 안에서의 지지를 통해 자살적 충동 대신 ‘멈춤’을 선택했고, 그 멈춤이 다시 ‘움직임’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애도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애도의 끝은 ‘잊음’이 아니라 ‘통합’

그녀는 다시 노를 잡았다. 노를 젓는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슬픔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슬픔은 그녀를 마비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감정이 되었고, 관계 속에서 공유된 슬픔은 그녀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배우고, 고통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다시 확인한 그녀의 항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며, 동시에 남은 자로서의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 과정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노를 젓는 사람들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그녀의 심상은 말해준다.

심리 상담에서 애도는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다. 그러나 진정한 회복은, 내담자가 자기만의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내면의 진실을 발견하고, 그 진실을 타인과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된다. 노를 다시 잡기까지의 여정은 애도의 끝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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