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늦게 배웠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참 늦게 배운 사람이다.
어릴 때는 ‘잘못한 사람이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잘못하지 않으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억울한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손해 보는 것 같았고, 내 감정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부딪힌 후, 서로 불편한 침묵이 흐를 때면 늘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길 기다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왜 먼저 사과해야 해?' 그 생각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최근에 관계를 정리한 친구들이 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자주 불편했고, 말 못 한 감정들이 마음속에 쌓여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 불편함을 넘기지 않고 관계를 멈췄다.
그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감정이 남았다. 그건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내가 말하지 못하고 넘겼던 작은 미안함들이었다.
그 친구들의 말투, 표정, 방식이 불편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나는 너무 오래 말하지 않았다.
그건 나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고, 참다가 터지듯이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전에 제대로 말했더라면 조금은 다르게 풀렸을지도 모른다.그걸 알면서도 왜 나는 그토록 말하기 어려웠을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균열을 보았다는 뜻이고, 그걸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다는 뜻인데.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다.
남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잘 못했다. 대신 서운함을 길게 말했고, 논리를 펼쳐서 내 입장을 설명했다.
감정은 설명으로 설득되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늘 말이 길었다.
요리 문제로 다퉜던 날, 나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냥 미안해. 그동안, 말 안 하고 참아서 더 어렵게 만든 것 같아.”
남편은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순간, 우리는 조금 가까워졌다.
말을 많이 해서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말을 할 때 가까워지는 거구나 싶었다.
아이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며칠 전, 아이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날 밤, 아이는 혼자 울었다. 작은 훌쩍임이 문 밖까지 들려왔다.
나는 방문을 열고 아이 옆에 앉아 작게 말했다.
“오늘은 엄마가 잘못했어. 미안해. 이야기 들어줬어야 했는데.”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아이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 '사과는 나를 작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다시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구나’ 싶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두려워했다.
그 말이 내 약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관계를 불리하게 만들 것 같아서, 혹은 그 말 뒤에 어떤 감정이 따라올지 몰라서.
하지만 이젠 안다. 미안하다는 말은 관계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용기고, 내가 내 감정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증거라는 걸.
나 자신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해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 참게 해서 미안해.”
“그때, 그냥 넘긴 거 사실 나도 알았어. 미안해.”
“말 못 해서 너한테 상처 준 건, 결국 나였어.”
그 말을 혼잣말처럼 하면서 나는 눈물이 났다.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일보다 스스로에게 사과하는 일이 더 어려운 날도 있다.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불편한 감정이 들면 그 자리에서, 또는 그날 안에 말하려고 노력한다.
“아까는 내가 좀 예민했어. 미안해.”
“그 말 들으니까 속상했어. 근데 나도 말이 좀 날카로웠지?”
“지금 기분이 엉켜있어서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는데, 그래도 같이 이야기하고 싶어.”
이런 말들이 내 입에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그걸 꺼낸 후에는 관계가 더 가볍고,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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