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그 말은 의외로 자주 들었다. 작은 실수에도, 무거운 고백에도, 감정을 조심스럽게 드러낸 뒤에도, 상대는 그 말을 꺼냈다.
“그래도 잘 버텼잖아.”
“다 지나갈 거야.”
“에이, 너니까 이겨내지.”
그 말들이 나를 위로하려는 진심에서 나왔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날의 '괜찮아'는 내 마음의 문을 닫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날은 유난히 지친 날이었다. 직장에선 ‘왜 나만 바쁘지?’ 싶은 시간이 이어졌고, 집안에는 말로 풀지 못한 긴장감이 고요하게 쌓여 있었다.
휴일 아침 친구와 모닝커피 약속이 있었다. 평일에는 좀처럼 시간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종종 만나고 헤어지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요즘 그냥... 좀 늘어지고 싶어.”
“말이 안 나올 때도 많고, 그냥 다 내려놓고 싶을 만큼 피곤해.”
그 친구는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말했다.
“야, 괜찮아. 넌 늘 잘 해왔잖아. 다 잘 지나갈 거야.”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거기 없었다. 나는 그냥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고, 그 감정을 잠깐이라도 누군가와 같이 들고 있고 싶었던 건데. 그 말은 내 감정을 봉합해버리는 리본 같았다. 예쁘게 묶었지만 속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친구의 의도는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더욱 말문이 막혔는지도 모른다.
그날 집에 들어오는 차 안에서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오늘 괜찮다고 하고 싶지 않았는데.’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했는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외롭게 느껴졌을까.’
‘괜찮아’라는 말은 때론 마음의 상태보다 상황을 정리하려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조용히 닫아버리는 말.
나도 떠올랐다. 나 역시 누군가의 말에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서둘러 대답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 사람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어서, 그 말을 꺼낸 건 아닐까.
‘괜찮다’고 말하면 상대가 그 말에 기대 잠시 안도할 거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 한편이 소외되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 달라지려 한다.
누군가 내 앞에서 감정을 꺼냈을 때 서둘러 뭔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아, 진짜 힘들었겠다.”
“그거...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인데.”
“말해줘서 고마워.”
그 말이 무엇을 해결해주진 않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닫지 않게 해준다.
나 역시 ‘괜찮다’는 말보다 “그랬구나”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풀렸으니까.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정말 괜찮아?’ 그 말이 입에 맴돌 때면 조금 더 솔직해지려 한다.
“아니, 사실 좀 힘들어.”
“응, 괜찮지 않아.”
“지금은 그냥 같이 있어줬으면 해.”
감정을 억누르고 혼자 해결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나에게 진짜 위로는 ‘괜찮아’가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돼’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 말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서둘러 정리하지 않고, 감정을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함께 머무는 사람.
그렇게 관계는 말로 이어지기보다 공감으로 잇는 침묵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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