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몇 해 전부터였다. 퇴근길이면 마트에서 무언가를 한가득 들고 온다. 표정은 잔뜩 들떠 있고, 유튜브에서 본 레시피를 말하며 오늘은 뭘 해줄 거라는 계획을 늘어놓는다.
그 모습이 싫진 않았다. 요리는 창조적인 일이니까. 그 안에서 뭔가를 새롭게 만들고, 누군가를 만족시키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런 남편이 일상의 권태를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했다. 그래서 그가 요리를 할 땐 기꺼이 조용한 조연이 되었다. 주방은 엉망이지만, 그 정도쯤은 내가 치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셰프, 나는 보조.’ 그렇게 스스로 역할을 정해 우리 사이의 평화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 평화는, 내가 조용히 감내하고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것이었다.
“프라이팬은 기름용, 양념용 나눠서 쓰자고 몇 번을 말했잖아.”
“아, 그거? 그냥 눈에 띄는 거 쓴 거지 뭐.”
“…….”
나는 그 대화의 패턴이 익숙해지는 게 점점 더 무서워졌다.
우리는 프라이팬으로 한두 번 말다툼한 사이가 아니다.
남편은 새 팬을 사줘도 다음날이면 눈에 띄는 걸 집어 든다.
코팅 팬에 양념을 올리고, 기름만 써야 할 팬을 긁고, 뜨거운 팬을 물에 바로 넣는다.
그리고 나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감정을 어느 날 정말로 ‘으앙’ 소리와 함께 터뜨렸다.
“야! 너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녀? 내가 한두 번 말했냐고! 귀에 닳도록 얘기했잖아! 또 너 멋대로 써? 넌 진짜 쓰레기 같은 놈이야!”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아이도 아니고, 울어버렸다.
세 살짜리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온몸으로 화를 토해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고! 왜 말을 해도 안 듣냐고! 밖에선 사람들 다 어려워하니까 네 멋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 쏟아지는 순간 나는 내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프라이팬 관련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식인, 블로그, 주부 커뮤니티, 셰프 칼럼까지. 코팅 팬의 용도 구분, 뜨거운 팬을 찬물에 넣으면 왜 안 되는지, 사용법에 대한 캡처들을 저장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링크를 보냈다. 설명 없이. 그냥 읽어보라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프라이팬 손잡이에 작은 이름표들이 붙어 있었다.
‘은별 전용’, ‘양념 금지’, ‘남편 사용 가능’ 남편 특유의 엉뚱함이 섞인 글씨였다.
나는 그걸 보면서 피식, 웃었다.
'머리가 아주 돌은 아닌데?'
하지만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내가 그걸 말로, 눈물로, 분노로 몇 년을 반복한 끝에야 이렇게 ‘이해된’다는 것.
나는 얼마나 오래 참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감정을 그 작은 프라이팬 하나에 얼마나 쌓아두고 있었던 걸까.
그 프라이팬은 그저 조리도구가 아니었다.
나는 매일 그 팬에 기대어 아이의 반찬을 만들고, 남편의 입맛을 맞추고, 스스로의 존재를 조용히 지탱해왔다.
그 안에는 내 분노도, 지침도, 노력도 모두 고여 있었다.
프라이팬 하나에 담긴 내 감정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쉽게 상하고 망가지는 나 자신과도 같았다.
남편이 프라이팬에 이름표를 붙인 건 반성이라기보단 ‘기억 장치’였을 거다.
그는 여전히 말보다 물증에 익숙한 사람이고, 감정보다 사실을 통해 설득당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조금 안도했다.
적어도 이제는 내 감정을 '기억해보려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 후로도 남편은 가끔 프라이팬을 잘못 쓴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울지 않는다.
대신 말한다. “손잡이 뭐라고 써 있었지?” 그러면 남편은 민망한 듯 웃는다.
그 웃음 속에서 우리는 다시 프라이팬 하나만큼의 거리만큼은 조금 가까워진다.
프롤로그)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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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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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따라 커피가 쓰게 느껴졌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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