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은별 2025. 5. 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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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방이 자꾸 어지럽다.

아침에 치워도 저녁이면 또 다시 물건들이 나뒹군다.

탁자 위에 놓인 영수증, 여기저기 차지하고 있는 컵, 다 쓴 화장품 샘플, 읽다 말고 쌓아둔 책들.

문득 정신을 차리면 나는 또 그 어지러움 속에 앉아 있다.

 

이전 같으면 벌떡 일어나 치웠을 거다.

정리되지 않은 공간을 보면 머릿속까지 어질어질해졌으니까. 나는 깨끗한 상태에서 숨 쉬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봐도, 그냥 둔다. 지우고 싶지만, 손이 안 간다.

무질서한 이 방이 어쩐지 요즘의 나를 너무 닮았다.

 

어떤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떠돌고, 어떤 생각은 꺼내지도 못한 채 마음 구석에 쌓여 있다.

그게 정리되지 않으니 몸도, 공간도 따라 흐트러진다.

나는 안다. 이 방이 어지러운 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 혼란스럽기 때문이라는 걸.

 

며칠 전, 남편이 말했다.

"요즘 왜 이렇게 방이 지저분해?"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도 묘하게 상처를 받았다. 정리되지 않은 방보다 정리되지 않은 내 감정이 더 엉망이었던 걸까.

가끔은 이 방 안이 내 마음의 지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혼란스럽고, 중간에 멈춰 있고, 방향을 잃은 채 그저 흘러가는 것들.

책상 위의 먼지, 옷장 옆에 미뤄둔 바구니, 문고리에 걸린 가방.

 

어느 하나도 내가 ‘일부러’ 흩뿌린 것은 아니지만, 또 누구도 ‘정확히 제자리에’ 놓지 못하고 있었다.

치우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춘 적도 많았다.

이걸 왜 이렇게 둔 거지? 이 물건은 지금 왜 여기에 있지?

그러다가 나는 문득 깨닫는다.

 

방을 정리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내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걸.

무언가를 버릴 수 없었던 것, 결정하지 못하고 미뤄둔 것들, 말하지 못한 상태로 쌓여만 갔던 일들.

그게 내 마음 안에서 방 안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치우지 못한 방을 보며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은 어지러울 시기인가 보다" 하고 중얼거린다.

그 말이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말을 할 수 있게 된 내가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햇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먼지가 떠오르고, 방바닥 위로 따뜻한 빛이 번졌다.

 

나는 오랜만에 창문을 열었다.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조금 상쾌한 기운이 들어왔다.

무언가를 억지로 정리하진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만 바꿔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방이 어지럽다는 건 어쩌면 삶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모든 게 제자리에만 있는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지러운 방 안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이건 지금 ‘살고 있는 중’인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오늘도 정리를 미룬다.

하지만 내 마음까지 미루진 않는다.

어지러운 공간 속에서도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가끔은 그냥 그 혼란 속에 앉아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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